베르나르 뷔페전이 다시 열린다.
2019년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보았을 때 뷔페의 팬이 되었다. 그때 운 좋게 정우철 도슨트 님의 해설을 들었다. 내가 뷔페를 사랑하게 되는데 정우철 도슨트님이 한 80%는 기여하신 것 같다.
새로 열리는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기다리며 지난 전시에서 봤던 그림들과 그때 들려주셨던 정우철 도슨트님의 설명을 전해본다.
1. 왜 뷔페의 그림엔 스크래치가 많을까?
베르나르 뷔페는 유년 시절 전쟁을 겪었다. 그가 겨우 15살이었을 때 도시에 폭탄이 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프랑스 사람들의 삶이 여과없이 보여진다.
말라비틀어진 과일, 반밖에 채워지지 않거나 비어있는 물병과 잔, 다 채워지지 못한 접시들에서 그 시기의 결핍과 부족을 짐작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그림재료를 찾기가 어려워 뷔페는 벽에 박혀 있는 천에 그림을 그린 후 널빤지나 빗자루로 만든 틀에 그 천을 고정하여 액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초기의 뷔페 그림들에서 스크래치되어 있는 부분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 스크래치는 부족한 물감 때문에 원하는 만큼 그림을 그리지 못해 화가 난 베르나르 뷔페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난 후 그림을 긁어 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림에 상처처럼 새겨진 스크래치 자국들에 그 시기 뷔페의 아픔과 고통이 담겨있다.
이 시기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 속 인물들은 말라비틀어진 좀비 느낌이 난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그의 작품을 선보였을 때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그림 속의 인물이 다 자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전쟁의 후유증이 컸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프랑스를 그려 낸 베르나르 뷔페를 사람들은 '20세기의 증인'이라고 불렀다.
2. 천재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몰락
전쟁 직후 어머니를 잃은 베르나르 뷔페는 1년 동안 그림만 그렸고 18세 되던 해 그의 그림들을 출품한다.
프랑스 파리는 그의 천재성에 놀랐고, 베르나르 뷔페는 20살에 프랑스 파리의 비평가 상을 받았다. 그 비평가 상의 공동 수상자가 뷔페보다 20살 많은 마흔 살 화가였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 이후 50년대 프랑스 파리는 말 그대로 뷔페의 세상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뷔페를 피카소와 견줬고, 피카소를 한물 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비평가 상을 받아 자금이 생긴 뷔페는 프랑스 프로방스로 떠나 5년 동안 자신의 기법을 다시 연구하였고, 그 때부터 그의 그림에 색이 펼쳐진다.
뷔페는 계속 승승장구하였고 28세에 이미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한다. 58년에는 입생로랑, 프랑수와즈 사강과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이로 뽑힌다.
그런데 이토록 천재로 추앙 받으며 인기를 끌었던 베르나르 뷔페를 오늘날 우리는 왜 잘 알지 못할까?
베르나르 뷔페는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하였고, 그것이 지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그를 점점 예술가보다는 스타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중들은 그의 작품보다 그의 사생활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비평가들은 가난할 때는 인간의 고통과 내면을 그리던 뷔페가 성공을 하고 난 후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비판하며 그가 전시회를 열면 참석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글을 하나도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얼굴도 잘생기고, 천재에다가 아내도 아름답고 돈도 많은 뷔페를 질투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예술의 중심지라는 타이틀을 뉴욕에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했던 프랑스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가 추상회화를 홍보하기 위하여 "더 이상 위대한 예술은 구상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며 뷔페의 구상회화를 매장시킨다.
하지만 뷔페는 비평가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욕하든 말든, 구상회화가 한물간 예술로 취급받든 말든 계속해서 본인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3. 화가로서 살고 화가로서 죽다.
매번 새로운 테마를 정해 시리즈작을 그렸던 그의 마지막 시리즈는 La mort(죽음)이었다. 파킨슨 병에 걸려 점점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들어지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던 그가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는 결국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살한다.
내가 아주 오랜 시간 눈을 떼지 못했던 마지막 해 작품들 중 하나는 Tempête en Bretagne, 1999 였다.
이 그림은 평면 사진으로가 아니라 꼭 실제로 봐야 한다. 두텁게 칠해진 물감을 휘저은 붓질에서 성난 파도, 그리고 그것을 그리고 있는 뷔페의 고통과 두려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브르타뉴 해변은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가 유년 시절의 그를 데리고 가던 곳으로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한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 속에서 단 한 번도 파도가 치지 않았던 그곳에 파도가 치고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그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으리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그림은 내가 너무도 애정하는 반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떠오르게도 한다.
베르나르 뷔페는 화가로 태어나 화가로 살았고 화가로 죽음을 맞이 했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전시였다.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강렬하고 의미 있었는데 그 수가 많아 더 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4. 뮤즈 아나벨과의 영화 같은 만남
번외로 정우철 도슨트님 설명 중에서 흥미롭게 들은 부분을 적어본다. 베르나르 뷔페의 아내인 아나벨 뷔페는 그가 너무도 사랑한 그의 뮤즈였다고 한다. 그들의 첫 만남 이야기가 흥미롭다.
사진작가 루포넬은 어느 할머니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할머니만 찍기에는 사진이 좀 심심해지는 것 같아 자기가 아는 두 사람을 불러 사진 속 엑스트라 커플로 앉아 있게 했다고 한다. 그 사진이 아래 사진이다.
진짜 이 사진 보고 빵 터졌다. 이 사진 원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한다!? 그냥 커플 사진인데~?
이 사진이 그들의 첫 만남이라고 하는데 정말 너무도 잘 어울리고, 그냥 오래 사랑한 커플 분위기가 난다. 천생연분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베르나르 뷔페 그림 중 nature morte au testament 1963 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푸르고 풍성한 꽃과 함께 그의 유언장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물감으로 지장도 찍어 놓았다. 유언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63년 4월 15일, 이것은 나의 유언장이다.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부인 아나벨 뷔페에게 남긴다.
유년 시절 전쟁의 고통을 겪고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기도 한 그였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산 베르나르 뷔페가 난 조금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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